차(茶)의 역사 : 당(唐)대의 차 문화(1)
차(茶)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음료입니다. 고대 신석기 시대를 거쳐 주왕조 시대, 한나라시대를 거져 점점 약용에서 식용으로, 식용에서 음용으로 그리고 기호 음료로 변화합니다. 오늘 이시간에는 차(茶)가 어떻게 대중화가 되는지 알아보도록 합니다.
1. 당(唐)대의 차 문화 - 보편화(普遍化)에서 대중화(大衆化)까지

약용과 식용으로 주로 쓰이던 차(茶)는 당(唐)대에 들어 엄청난 변화가 시작됩니다.
바로 수나라 때의 대운하(大運河) 건설로 중국의 여러 지방으로 대량운송이 가능해졌기 떄문이죠.
대운하를 통하여 상업이 활발해지고 인구의 이동이 원활해지면서 문화 대 문화가 교역을 하게 됩니다.
그로인해 자연스럽게 차 문화도 교유하게 되며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즉 귀금속과 같은 값을 내야 살 수 있는, 귀족 및 부호들의 전유물이었던 차(茶)가 대량 운송으로 서민들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내렸습니다. 귀족과 부호들이 즐겼던 차이니 만큼 서민들 또한 '귀족이 누렸던 것이니, 나도 한 번 마셔보자!'라며 앞다투어 차를 마셨던 것이었죠.
그리하여 사람들이 몸소 차를 품 속에 끼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차를 달여 마실 정도로 음다(飮茶)풍속이 확산 되었습니다.
2. 당(唐)대의 차 문화 - 선종(禪宗)불교의 성행


달마(達磨)조사를 개조(開祖)로 하는 선종불교가 당나라시대에 성행하게 됩니다. 선정(禪定 : 한 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흐트러짐이 없음)에 이르는데에 극복해야 할 수마, 망념, 좌상부정을 제거하여 득도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인식 되었고 그 이유는,
1. 좌선을 할 때 졸음을 쫓거나 배가 부를 때 소화 효과가 뛰어났다.
2. 불음주계(不飮酒戒 : 불교의 오계(五戒)중 하나로,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줄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계율)를 지키기 위해 술 대신 차를 음용한다.
3. 하루에 두끼를 먹으니 부족한 식사량을 보충하기 위해 차를 마신다.
이렇듯 불교의 정신세계와 접목이 되어 차를 발전 시키고 보급했습니다.
- 끽다거(喫茶去) : '차나 한 잔 하시게나.'

당나라 시대에 아주 유명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주 종심(趙州 從諗, 778~897)선사.
차를 선(禪)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선문답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선승(禪僧)입니다.
어느날, 조주 선사가 머물고 있던 관음원(觀音院)에 두 명의 수행자가 찾아와 절을 올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불법(佛法)의 큰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에 조주 선사는 대답 없이 되물었다.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
수행자가 대답했다.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자 다시 조주 선사가 말했다.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喫茶去]."
곁에 있던 또 다른 수행자가 물었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큰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는 그에게도 똑같이 물었다.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
그러자 또 다른 수행자가 답했다.
"예, 한 번 있습니다."
이에 조주는 다시금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喫茶去]."
옆에서 듣고 있던 원주(院主) 스님이 물었다.
"스님! 어째서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사람이나, 한 번이라도 온 적이 있는 사람이나 모두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라고 말씀하십니까?"
조주 선사는 원주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
"원주, 자네도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喫茶去]."
[네이버 지식백과] 조주 선사와 끽다거 - 차와 선의 관계와 다선일여 (찻잎 속의 차, 2008. 8. 14., 이진수, 이진미, 주은철)
조주선사의 거처에 와 본 적이 있든 없든 의심을 품었든 모두에게 차를 권했던 일화에서 조주 선사는 차와 선을 하나로 보면서 불교 역사에 한 획을 그으며 많은 승려들이 그를 본받아 차를 마시며 선의 경지를 끌어올리는데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차는 승려의 생활에 빠질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 불교 말살 정책 : 환속한 승려들의 차 생활
이렇게 조주 선사의 끽다거 화두로 차를 마시며 선정을 이루는 것이 유행이 된 불교계는 수 많은 승려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독이 되었는지 승려의 수가 급증하자 사원경제가 무너지면서 세수와 부역이 감소됩니다. 그러면서 황실에서는 불교 말살 정책이 실시되는데 바로 당 무종 845년에 회창폐불(會昌廢佛, 도교를 신봉하여 전국의 사찰을 철거하고 승려와 비구니를 환속한 사건) 사건이 터지며 많은 승려들이 환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차 생활이 일상이 된 승려들은 환속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차를 마심으로 이를 본 일반인들도 따라서 차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차를 끓여 마시게 되었습니다.
차가 독이 되어 불교계가 화를 입었으나 환속한 승려들로 인해 차 문화가 확산이 되었으니 차 문화 입장에서는 정말 전화위복(轉禍爲福)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당(唐)대의 차문화 - 엘리트들의 차문화 트렌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우리에게 친숙한 달타령이라는 노래에도 나온 이태백이라고도 불린 중국 최고의 시인 태백(太白) 이백(李白)을 모두 알 것입니다. 그만큼 당대에는 걸출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정도로 문학의 번영시기였습니다. 과거를 통해 문인들을 배출했고, 과거에 응시한 문인들과 시험관들은 마음을 안정시키기위해 차와 다과를 먹고 마셨습니다. 또한 당대 문학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차시(茶詩)였는데 많은 문인들이 차를 마시며 차시를 짓고 그것을 나누고 서로 의를 다졌으니 문인들이 모여 과거를 통해, 그리고 차시를 짓고 의를 다지면서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계층이 차를 접할 수 있는 기회였고 차가 확산이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당대의 차문화에 대해 전반적인 부분을 알아보았습니다. 당대에는 차 문화의 확산과 대중화가 가속되었던 시기였고 확산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되는데 그 중 세 가지 부분만을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차문화 확산과 대중화가 되는 나머지 과정인 차 관련제도, 금주령으로 인한 차문화 확산, 외교와 교류를 통한 차문화 확산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